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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뜨락에서] 말(Word)과 칼(Sword)

시화 시인의 신간 ‘내가 생각한 인생이 아니야’를 읽었다. 그는 시인으로 본인의 시집과 자신이 좋아하는 시들을 엮어 시집을 내기도 했다. 많은 인도 여행기를 바탕으로 한 명상집, 번역서 그리고 우화집, 산문집을 내기도 했으며 우리에게는 명상가로도 널리 알려져 있다. 그의 작가로서의 특징은 쉽고 편안한 단어로 삶의 깊은 내면과 근본을 예리하게 지적하면서도 반짝이는 유머로 독자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시인 윤동주는 ‘쉽게 씌여진 시’에서 ‘인생은 살기 어렵다는데/ 시가 이렇게 쉽게 씌어지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라고 썼다. 그 당시 윤동주는 일본에 유학생 신분으로 조국의 어두운 앞날을 염려하면서 시 쓰는 일 말고는 할 수 있는 일이 없음을 부끄럽다고 자책하면서 이 시를 썼다고 한다. 시인 류시화의 글도 눈에 보이지 않는 창작의 고통 너머로 읽는 사람의 마음을 편하게 해주며 많은 교감을 불러일으킨다. 페이지마다 예지가 번뜩이는 말들로 가득하다.     말(Word)과 칼(Sword)이 한글로나 영어로 rhythmical하고 이 둘은 잘못 사용할 때 같은 결과를 낳는다. 인생이 주는 가장 큰 선물은 ‘다른 인생’이다. 삶이 힘든 시기일수록 마음속에 아름다운 어떤 것을 품고 다녀야 한다. 그 아름다움이 우리를 구원한다. 우리는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기 위해 책을 읽는다. 여행 목적은 나의 작은 자아를 부수고 내 생각과 선입견을 비우고 안으로 깊어지고 밖으로 더 넓어지기 위해 내 상상을 뛰어넘는 세계를 경험하는 것이다.     사랑하면 세상이 말을 걸어온다. 설레고 감동적이다. 별들이 쏟아진다. soul group을 만난다. 세상은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자에게는 아름다움을 주고 슬픔을 발견하는 자에게는 슬픔을 준다. 예민한 영혼은 특별한 재능과 섬세한 감각으로 다른 이들이 놓치는 현상의 이면을 보고 울림 있는 내면세계를 가지며 문학과 예술에 감동한다. 꽃을 보고자 하는 사람에게는 어디에서나 꽃이 보인다. -앙리 마티즈- 장미의 울음소리를 들은 적이 있는가. 장미는 장미꽃의 아름다움이 아니라 가시에 대해서 말할 때 운다. 에너지는 우리가 집중하는 곳으로 흐른다. 어떤 단어에 힘을 실으면 생각의 에너지가 그곳으로 모인다. ‘나는 아픈 것이 싫어’하면 마음은 아픔에 집중하게 되고 그때 에너지는 아픔 쪽으로 흐른다. 이때 에너지의 방향을 바꾸는 방법은 ‘나는 건강한 것이 좋아’라고 말하는 것이다. 같은 의미이지만 긍정 기운을 발산하는 단어는 가슴을 뛰게 한다.     자신이 좋아하는 것으로 자신을 정의 해보자. 생의 마지막에 당신이 무엇을 좋아했는지 떠오르게 된다. 그것이 당신 영혼의 색깔이다. 정신 분석학자 에스테스는 ‘우리의 임무는 세상 전체를 한꺼번에 구원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손이 닿을 수 있는 부분부터 손을 뻗어 나가는 것이다. 한 영혼이 슬퍼하는 다른 영혼을 돕기 위해 하는 작고 조용한 일은 큰 의미가 있다’라고 했다. 삶을 예술로 만드는 이가 진정한 예술가이다. 상실의 깊이는 다 다르다. 이는 사랑에 의해서만 회복될 수 있다. 불완전한 인간을 완전하게 만드는 것이 사랑이다.     삶을 꽃피우는 방법에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스스로 꽃을 피우는 일이고 또 하나는 다른 사람의 삶이 꽃으로 피어나도록 돕는 일이다. 당신도 나도 누군가를 꽃으로 피어나게 할 수 있다. 한 개인이 나라를 구하고 인류를 구하는 일은 쉽지 않다. 우리 주변에 있는 이들의 아픔과 고통을 먼저 읽고 그들에게 손을 뻗는 일이 우선이다. 내가 편안하고 가족과 친구가 편안할 때 우리는 그 너머를 생각할 수 있다.     ‘바람이 분다. 살아야겠다/ 거대한 대기는 내 책을 펼쳤다 또 다시 닫는다/ 가루가 된 파도는 바위로부터 굳세게 뛰쳐나온다.’ 폴 발레리의 시는 오늘도 나를 때린다. 부숴버린다. 정명숙 시인삶의 뜨락에서 sword word 시인 류시화 시인 윤동주 시화 시인

2024-04-19

[삶의 뜨락에서] 우물이 있던 마을

지금은 상수도의 발달로 우물을 거의 찾을 수 없지만 우물은 우리 선조들의 삶 속에 깊이 자리하고 있다. 신라 김유신 장군 집에 있던 우물은 재매정이란 이름으로 기록되어 있고, 궁궐에서 궁녀들이 우물 안으로 뛰어들었다는 숱한 비화가 전해지는가 하면, 민가에서는 아낙네들이 우물가에서 동네 쑥덕공론을 일삼기도 했다.     시인 윤동주는 ‘산모퉁이를 돌아 논 가 외딴 우물을 홀로/ 찾아가선 가만히 들여다봅니다…. //그리고 한 사나이가 있습니다./어쩐지 그 사나이가 미워져 돌아갑니다.//돌아가다 생각하니 그 사나이가 가엾어집니다/’라고 했다. 시인이 들여다본 우물 속에 비친 자기 모습은 일제 식민지 치하에서 절망하는 청년들의 표상으로 볼 수 있으며, 윤동주의 이 ‘자화상’은 다른 시들과 함께 일제 경찰의 주목을 받았고 결국 시인은 후쿠오카 감옥에서 27세로 옥사하고 만다.     이렇듯 우물은 실생활에서 사라져도 이미지는 문학 속에서 영원히 존재하게 된다. 또한 우리는 ‘우물안 개구리( 井底之蛙)’나 ‘우물 안에서 하늘을 본다(坐井觀天)’는 말을 많이 들어왔다. 우물이 없어짐과 함께 우물이라는 말도 사어가 되지 않고 격언을 통해 의미로 남아있다. 여기에서 우물은 한정된 공간에서의 견문이 넓지 못함을 비유함으로써 젊은이들이 도시로 더 넓은 세상으로 나가야 한다는 필연성도 내포하고 있다. 이렇듯 성장기에 공부하러 또는 살아갈 방도를 찾아서 너도나도 고향을 떠나왔지만 잘 살든 그렇지 못하든 어디서 어떻게 살아가든 사람들은 동심이 자라던 고향에 대한 그리움의 정서를 품고 살아가는 것 같다.       필자가 어렸을 때 우리 동네에는 우물이 두 개 있었다. 하나는 마을 한가운데 있어서 두레박을 사용해서 물을 퍼 올리는 큰 우물이었는데 흰옷 입은 여인들이 그 주변에 있었던 거로 기억한다. 다른 하나는 읍내 학교에서 돌아오는 길에 동네 어귀에 있던 골맥이 샘이다. ‘골맥이’란 마을의 수호신을 나타내는 말인데 논둑길을 따라가면 시멘트와 돌로 둘러싸인 둥그런 샘이 있었다. 바가지로 물을 퍼 올리는 높지 않는 우물이었는데 항상 물이 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게 고여있었다. 그런데 우리 할머니는 설날이 지나 정월 초이틀 이후 새벽 3~4시쯤 골맥이 샘으로 가 새로 고이는 차가운 물로 머리를 감고 목욕도 하셨단다.  그리고 맑은 물을 물동이 담아 이고 논둑길 제방둑길을 걸어오셨다고 한다. 머리에 고드름이 내리고 흰 한복 치마저고리는 얼음으로 버석거렸다고 하셨다. 집에 도착해서는 몸도 녹이지 않은 채 병풍을 친 소반에 정화수 올려놓고 정성스레 기도하셨다고 한다.     할머니가 별이 담긴 물을 이고 걸어오신 새벽의 얼음길은 내가 세상의 어려운 길을 지날 때마다 귀중한 자양분으로 작용한 것 같다. 고향을 떠나 이역만리에 살고 있지만 마음속으로 가끔 찾아가 산 복숭아꽃이 분홍으로 번지는 산과 들을 거닐기도 하고, 눈이 내리는 마을을 바라보기도 한다. 조상님들이 실천하시며 베풀어주신 가르침은 우물 안에서 솟아나는  맑은 물처럼 내 정신의 깊은 원천이 되어 있음을 느낀다.   권정순 / 전직교사삶의 뜨락에서 우물 마을 우물안 개구리 마을 한가운데 시인 윤동주

2023-0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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